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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의 의미와 탄생 그리고 독립운동/ 동화약방 그리고 '부채표'/ 민족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보당 윤창식선생/ 동화제약 '가스활명수' 기네스북

by 행동하라. 바로 지금! 2024. 6. 20.

출저 - 나무위키

1. 활명수의 의미

우리가 소화 안될 때 마시는 '가스활명수' 그 활명수의 의미가  한자로는 活命水. 즉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입니다. 당시 조선 백성들은 잦은 소화불량과 위장장애로 힘들어했고, 급체 등 위급할 시 활명수를 마시면 신통한 효력이 있어 실로 만병통치약 같은 존재였습니다. 활명수가 소화 문제와 위장 질환 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는 것처럼, 건강과 활력을 갖게 해 준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2. 활명수의 탄생

활명수는 조선 말기 1897년 고종이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시던 당시 임금의 선전관을 지낸 민병호 (閔竝浩) 선생께서 궁중 비방에 양약의 장점만 취하여 일종의 혼합된 처방을 완성했는데 이것이 대한민국 최초의 신약인 활명수입니다. 활명수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의약품으로, 전통 한약 재료와 서양의학의 장점을 취하고 접목하여 개발하여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백성들까지 널리 보급하고자 만들어졌습니다.

 

민병호 선생은 서양의학을 알아 갈수록 근대 서양문명의 핵심이 기독교라는 사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런 지식을 기반으로 그는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어 한국 최초의 장로교회인 정동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기독교가 스며들자 내 이웃의 복리증진을 위해 힘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알렌으로부터 배워 습득한 서양의학의 장점을 택하고 생약의  궁중 비방을 섞어 탄생한 것이 활명수입니다.

 

3. 활명수의 독립운동 및 서울연통부

활명수는 대한민국의 독립운동 역사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활명수는 백성들의 생명을 구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생명을 구하는데 크나큰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민병호 선생은 활명수 판매 수익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며, 조선의 독립운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했습니다. 활명수는 당시 조선 내에서 매우 잘 팔리는 제품이었고, 이를 통해 얻은 수익은 상당했습니다. 민병호 선생은 이 수익의 일부를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하였고, 당시 독립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비싼 가격이었던 활명수를 소지했다가 현지에서 되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활명수는 그 자체로 건강을 지키는 의약품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대한 재정적 지원자로서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제 치하, 동화약방 순화동 본사에는 서울연통부(聯通府)가 비밀리에 설치되었습니다. 1919년 7월 상해임시정부가 비밀연락 행정의 첫행보로 국내와 국외의 연결을 목표로 서울에 설치한 비밀 행정부서가 연통부입니다. 그 조직 연통제는 국내 각 시·도·군·면까지 체계적으로 갖추고 온갖 정보와 군자금을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하였습니다. 그 후 일제가 전국의 여러 조직을 적발하면서 활동은 주춤하게 되었고, 민병호의 아들 민강 선생은 그 당시 구속되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렀다고 합니다. 1995년 광복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동화약방 창업지인 서울 중구 서소문로에 서울 연통부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 후 동화약방을 인수한 윤창식 선생과 그의 아들 윤광열 역시 항일단체인 신간회와 광복군에서 활약하면서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힘썼습니다. 모두 [제약보국(製藥保國):약을 통해 국가를 지키자]을 실현한 독립운동가 그리고 우국지사입니다. 

 

4. 동화약방의 설립 및 부채표의 의미

1897년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할 때보다 한 달 빨랐던 9월 드디어 노천 민병호 선생은 장남 민강과 함께 활명수를 대표 제품으로 서울 중구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同和藥房)을 설립했습니다. 한국 기업 전체를 보면 동화제약은 두산그룹(1896년)에 이어 두 번째로 뿌리 깊은 기업이 됩니다. 활명수가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이 불티나게 팔리자 활명수를 모방한 가짜 제품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1910년 동화약방은 활명수를 보호하고 그 가치를 차별화하기 위해 건강과 안녕을 상징하는 의미를 갖는 부채표를 만들고 상표등록을 합니다. 민병호 선생은 "부채는 사람들을 시원하게 해 주고, 활명수는 사람들을 건강하게 해 준다"는 의미를 담아 부채표를 만들었고, 부채는 여러 부챗살이 한데 결속되어 있어 일심동체를 뜻했습니다. 그래서 ‘합심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동화’의 뜻과도 일맥상통하게 연결됩니다. '부채표가 아닌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광고로 잘 알려진 동화제약의 부채표는 국내 최초의 상표등록 사례이기도 합니다.

5. 부채표 동화의 제2 창업자민족기업가 보당 윤창식선생

 그 이후 일제 경찰의 탄압을 받아 동화약방의 경영이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1937년 민강의 가족이 당시 민족기업가인 보당 윤창식 선생에게 경영권을 넘겼습니다. 보당 윤창식 역시 애국심이 투철한 민족기업인으로 존경을 받던 인물이었고, 그는 당대의 큰 인물로 꼽히는 육당 최남선이나 인촌 김성수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에 앞장섰습니다. 

 

윤창식 선생은 민족기업 부채표 동화의 제2창업자로 취임하면서 “오직 생명을 살리는 좋은 약만 만들자. 이 땅에서 핍박받는 동포들을 돕고 일제에 의해 쫓겨나 해외에서 유랑하는 동포들에게도 동화의 양약이 전해지게 하자”라는 각오와 다짐을 강조했습니다. 1937년은 중일전쟁과 물자통제로 민족기업들이 사업을 하기 아주 힘든 시기였지만, 보당은 올바른 인재 채용과 개혁을 앞장서면서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했습니다. 정직과 성실을 토대로 기업 근대화에 매진했고 쓰러져가는 동화약방을 다시 일으켜 세웠습니다. “좋은 약이 아니면 만들지 말라. 동화는 동화 식구 전체의 것이요, 또 이 겨레의 것이니 온 식구가 정성을 다해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기업으로 이끌어라.”동화약품은 보당의 유언대로 바른 경영철학 정신으로 어려운 시기마다 슬기롭게 그 위기를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6. 독립운동가  보당 윤창식 선생

 윤창식 선생은 1915년 조직된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獎勵契)에 총무직을 맡아 경제자립운동에 헌신했습니다. 이 항일비밀결사체는 민족경제 자립을 위해서는 먼저 조선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이뤄야 한다는 목적으로 조직된 경제독립운동 단체였습니다. 보당은 주식제도의 장점을 주장하며 그의 일생에 걸쳐 스스로 사업을 일구고 자본을 축적하는  한편으로 조선의 경제자립 운동에 헌신하며 독립운동과 빈민구제 활동에 앞장섰습니다

그는 1917년 일제 경찰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으나 산업진흥단체로 위장한 것으로 속여 석방되었습니다. 석방 후 1920년대부터 우선 적은 자본으로 사업이 가능한 정미업을 시작으로 근검절약으로 자본을 늘려갔으며 보당은 1922년 빈민에 복지사업을 하는 보린회(保隣會) 사업에도 적극 참여했습니다. 서민들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사재를 털어 행랑식 주택을 보급하는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1927년부터는 신간회를 남모르게 재정적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독립운동가로서 큰 기여를 했습니다.


7. 동화제약의 가스활명수

1967년 시대 변화에 따라 활명수에 탄산을 첨가한 가스활명수를 출시했습니다. 지금까지 가스활명수는 약 85억 병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활명수가 꾸준히 사랑받는 비결은 거의 부작용이 없고, 음용 시 편의성이 뛰어나며 120년 이상 동안 소화제로서의 효능 효과가 검증됐기 때문에 소화제 대표 자리로 등극하였습니다.

 

한국기네스협회에서 1996년부터 국내 최고의 제조회사, 최고의 제약회사, 최초의 등록상표인 부채표, 최초의 등록상품인 활명수까지 총 4개 부문에 걸쳐 기네스북에 올랐으며, 기록을 인정하는 인증서도 함께 받았습니다.

 

 

활명수의 역사는 바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이자 의약품의 역사이며, 나아가 근대적 기업 경영의 발자취나 마찬가지입니다.